KZ Story
고려아연이 지향하는 브랜드 가치, 미래 비전을 공유합니다.
제국 흥망성쇠의 동반자, 금
2024-04-19
KOREA ZINC

episode. 01
METAL HISTORY


인류는 오래전부터 금속 물질을 사용하면서 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대표적으로 인류 문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위대한 발명 중에서는 금속으로 만든 활자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금속활자 인쇄술이 등장하자 정보의 기록과 보급이 급속도로 빨라지면서 지식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우수한 인쇄술을 보여주는 ‘직지’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현존하는 최고의 금속활자본이기도 합니다. 이 기술은 한글을 반포한 이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한글을 배우는 데 큰 역할을 하며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이처럼 금속은 역사의 다양한 장면에서 묵직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 왔는데요.
첫 번째로 소개할 금속, ‘금’은 부를 나타내는 척도이자 국가 장래의 화두라 말할 수 있습니다. 찬란한 문화와 기술을 꽃피우는 동력이 되기도, 때로는 전쟁이라는 끔찍한 재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 금과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스페인 침략으로 금을 착취당하고 멸망한 잉카제국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마추픽추’는 매년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옛 잉카제국의 유적지입니다. 산과 절벽, 울창한 수풀에 뒤덮여 오직 위에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해 ‘공중 도시’라 불리는 이 유적지를 보면, 당시의 수준 높은 건축문화와 농경기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모든 건축물에는 화강암이 빈틈없이 견고하게 맞물려 있어 수많은 지진에도 끄떡없던 석조기술부터 돌벽을 통해 토양 유실을 막고 배수시설을 갖춘 계단식 경작지까지 치밀하게 설계된 고대 잉카인들의 지혜로움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토록 신비롭고 경이로운 고대도시를 남겨준 잉카는 왜 고작 168명에 불과한 스페인 군대에 허망하게 무너졌을까요?
잉카문명의 멸망에 대해선 다양한 가설이 있지만, 스페인의 침략이 가장 결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1532년 11월 잉카의 아타우알파 황제는 8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을 ‘신과 동등한 존재’로 여겨 누군가 침략해올 것이라는 생각도 못한 채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가톨릭 복음을 전하려 왔다는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황금을 넘겨받은 스페인인들은 자신들의 약속을 저버렸고 황제는 끝내 교수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그 당시 서유럽의 군사적 우위는 절대적이었고 철로 만든 갑옷, 화약 무기 등으로 무장한 침략군과 달리 겨우 돌이나 청동기, 손도끼 정도였던 인디오들의 무기는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후 잉카제국은 스페인 정복자들과의 전쟁과 가혹한 노동, 그리고 천연두, 홍역 등의 각종 전염병으로 주민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며 안타까운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황무지였던 캘리포니아를 번영시킨 금빛 열풍




미식축구 팬이라면 모두가 아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역 미식축구팀의 명칭, ‘포티나이너스(49ers)’ 이름의 뜻인 1849년은 이 지역과 무슨 인연이 있을까요? 1848년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강 근방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이듬해 금이 쏟아져 나온다는 소문이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하면서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중남미, 중국 등 전 세계 수많은 노동자들이 금을 캐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그 수는 무려 25만 명으로 추산되며, 이렇게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이주한 이들을 ‘포티나이너스’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시(Gold Rush)가 한창일 1851년, 캘리포니아의 금 생산량은 전체 연방예산보다 많은 규모인 85톤까지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가가치는 포티나이너가 아닌 이들을 위해 은행이나 각종 상점을 연 사람들에게서 흘러갔습니다.


다시 말해 골드러시로 인한 급격한 인구증가는 미국 서부발전의 중요한 발판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 당시 금을 운반하고 현금을 유통하는 사업의 필요성을 일찍 깨달은 헨리 웰스와 윌리엄 파고가 수송과 금융 업무를 담당하는 회사를 설립한 것이 웰스파고 은행의 시초입니다. 또한, 리바이 스타라우스는 잘 찢어지지 않는 작업복 바지를 만들었고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한 리바이스 청바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도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도로, 교량 및 철도 건설과 같이 물자를 운송하는 데 필요한 기반시설을 구축하면서 점차 도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후 1850년 캘리포니아는 정식 주(州)로 승인됩니다. 골드러시는 비록 황금에 대한 인간의 탐욕에서 시작되었지만, 미서부의 여러 낙후된 마을들이 신흥 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스트타운으로 불리던 캘리포니아가 전 세계 첨단 기술을 선도하는 오늘날의 실리콘밸리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황금의 나라로 불린 신라의 섬세한 미적 감각



*출처 : 국보 황남대총 출토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우리 선조 장인들이 빚어낸 다양한 금속 유물 중 ‘금관’과 ‘귀걸이’는 신라의 화려한 문화와 고급스러운 예술성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5세기 초부터 6세기 초반까지 백여 년 동안 신라에서 금은 귀중한 금속을 넘어 일상과 예술, 심지어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게 됐습니다. 개 목걸이와 원숭이 목태부터 일상에서 누구나 사용하는 그릇에 이르기까지 황금을 두루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라 눌지 마립간이 백제의 비유왕에게 황금과 야광 구슬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은 당시 신라가 황금을 넉넉하게 보유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렇다면 신라의 금속 공예품은 모두 순금 100%로 만들어졌을까요? 신라는 이렇게 황금이 풍부했음에도 불구하고 합금을 선호했다는 점이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신라 장인들은 금이 가진 가치보다는 금속의 내구성, 가공 기술 등을 고려해 이 같은 선택을 했을거라고 추측합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신라 금관입니다. 분석 결과, 약 80~89%의 금을 함유했으며 은도 일정량 포함돼 있었습니다. 각 금관의 순도는 19.3~21.1K 사이로 신라 장인들이 다양한 물성과 미적 효과를 추구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금관과 함께 출토된 다양한 장신구에서도 금속의 순도가 제각기 달라 고대 신라가 지닌 세련된 미적 감각과 고도의 금속 공예 기술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케 합니다.


*출처 : (왼쪽) 보물 굵은 고리 금귀걸이, 국립중앙박물관 (오른쪽) 국보 금관총 금제 허리띠, 국립중앙박물관

‘황금의 나라’라 불린 신라의 합금 사용은 금속공예품의 문화적 독창성과 예술적 풍부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신라 장인들의 손에서 탄생한 이 화려한 금속 유물들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뛰어난 예술성과 고대 왕국의 찬란한 문화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황금을 둘러싸고 인류 문명의 역사가 어떻게 펼쳐졌는지 저마다의 이야기를 알 수 있었는데요. 다음 편에도 역사 속에 숨겨져 있는 흥미로운 금속 이야기를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